[10] 노병의 독백 - 주경야독(晝耕夜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으나, 돈 많은 사람이 경험삼아 하는 고생은 낭만이 있고 즐거움이 있지만, 돈 없는 사람이 세 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하는 고생은 죽 지 못해 까무러치는 고생”이다. 요세 신무이나 TV 뉴스 보도에 자살자가 늘고 있다는 보도에, 상 호는 거꾸로 살아도 이 승(乘)이 좋 다는 속담이 있는데 오죽하면 죽겠 느냐고 그 심정에 동정이 간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패배하고, 한국에 나왔던 일본 사람이 본 국으로 들어가니, 한국은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물자는 귀 하고 살기는 힘들다. 공장 생활 2년에 장돌뱅이 생활 2년으로, 중학교 진학은 같은 또래보다 4년이 늦었지만, 경쟁 상대였던 순자가 서울에서 학교에 다닌다..
[11] 노병의 독백 - 6.25 사변-同族相殘 노병의 독백 - 6.25 사변 同族相殘 북쪽엔 소련군이 지주하며 군정을 펴고, 남쪽엔 미군이 들어와서 군정을 하며, 각각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정치를 하지만, 외치는 구호는 요란한 데, 어제까지의 생활 방법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전체주의 교육을 받은 상호로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둘 다 솔깃한 주장이오, 헷갈리는 소리지만, 학교 등록금 마련을 위해 밤낮으로 뛰어야 했던 상호에겐 공산주의가 유혹을 한다. 1950년 6월 17일, 다른 사람은 포장된 ‘아스팔트’ 길을 걸으며 중학교(구제) 를 다니고, 따듯한 온돌방에서 잠을 자며 졸업장을 받았지만, 상호는 가시밭 길을 걸으며 학교에 다니고, 길가에서 잠을 자며 졸업장(선린공립상업중학교) 을 손에 쥔다. 중학..
[12] 노병의 독백 - 6.25 사변-인민군 정찰병 노병의 독백 - 인민군 정찰병 38선을 넘어 남쪽을 기습 점령한 인민군은 서울에서 2,3일을 춤춤 거리더니, 한강을 건너 파축지세로 남침하여 천안까지 침공해선, 공격 방향을 영남 지역과 호남지역으로 돌린다. 6,.25 사변이 발발하자 고향으로 내려온 상호는 마땅한 피난처가 생각나지 않아 집에서 서성거린다. 사변이 나고 한 달이 지난 7월 중순이다. 아침밥을 먹고 마루에 않았는데, 밖에서 주인을 찾으며 빨간 바탕에 노랑색 고무래 정(丁 )자 견장을 단 인민군 특무장이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온다. 호남 지역으로 남침을 계속하던 인민군의 정찰병이다. 가까이 오는 인민군을 보고 상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않는 데, 인민군은 마루에 걸터앉는다. 작업복 상의와 작..
[13] 노병의 독백 - 6.25 사변-공산당은 우익 인사를 학살한다 노병의 독백 - 공산당은 우익 인사를 학살 한다 저녁 상머리에서 상호 여동생이 말하기를, “모를 심던 인호(金仁鎬)가 등 넘어 역말의 동수(李東洙)에게 끌려갔는데, 저녁때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한다. 동수 동생 성수(李星洙)는 6.25 사변이 나기 전에 공산당을 지지하는 전단을 야간에 집집마다 뿌린 적이 있는 데, 그 뒤로 양복 입은 청년 2명이 동네로 들어와서 인호에게 성수네 집을 묻기에, “등 넘어 역말이다”라고 가리켜 주었더니, 청년들은 역말로 넘어가서 성수를 데리고 가더니, 오늘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자유당 시대엔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사변이 발발하니 인호가 성수네 집을 묻는 청년에게 “등 넘어 역말이다”라고, 가리켜..
[14] 노병의 독백 - 6.25 사변-공산당의 집단학살 노병의 독백 - 공산당의 집단 학살 1950년 9월 26일 추석날 아침이다. 면 인민위원회에서 만 17세로부터 40세까지의 젊은이는 12시까지 보리쌀 2말을 짊어지고 면 인민위원회 광장으로 모이라는 동원령이 떨어진다. 낙동강까지 진격한 인민군이 전투를 중지하고 의용군의 보충을 기다린다고 한다. 부락 사람을 야간에 돌다리 느티나무 밑에 모이게 하고, 공개적으로 뽑던 모병 방식이, 상황이 급해 부락 단위의 집회가 아닌 동네 단위의 서면 모병으로 인원이 집결되면, 부락 단위가 아닌 동네 단위로 면 인민위윈회까지 오라고 한다. 젊은이의 대부분은 피난을 가고 동원령에 응한 사람은 10여 명 뿐이다. 동원에 응한 사람은 의용군으로 끌려가 낙동강 전선에서 죽으..
[15] 노병의 독백 - 6.25 사변-서울로 가는 길 노병의 독백 - 서울로 가는 길 1950년 10월 하순이다. 상호는 공산 치하에서 4개월을 숨어 지내는 데, 9월 28일 서울에서 인민군이 물러가고 치안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상호는 서울로 옿라가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결심하고 집을 나선다. 100리 길을 걸으며 동네 입구마다 보초 서는 치안대원에게 인민군이 패퇴하고 서울이 수복됐다는 말을 듣고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 서울로 간다니까 통행을 허락한다. 서울로 가려면 걸어서 이틀이 걸리는 데, 온양온천에서 해가 저물어 여인숙에서 하루 저녁을 묵을 때다. 걸어 오느라 피로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어 곤하게 잠든 한밤중에 상호를 깨우는 인기척에 놀라 눈을 뜨니, 5,6명의 청년이 잠자는 상호를 둥글게..
[16] 노병의 독백 - 국민방위군-18부대 노병의 독백 - 국민방위군 (18부대) 10시가 되자 현역 군인은 아니지만 군인과 같은 복장을 한 민족 청년단 단원이 응소자들을 모이게 하더니, 호명을 하면서 중대 편성을 한다. 편성이 끝나자 청년단 단원이 말하기를, “정상적인 계획에 따른다면 여러분은 신체검사를 거쳐 합격자만을 기차에 태워 대구 제5보충대로 입영을 해야 하나, 중공군의 진격이 빨라 여러분은 목적지까지 도보로 걸어가서 입영 절차를 밟게 됩니다. 여러분은 남하하는 동안에도 소집 영장을 받은 군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저희들 청년단원의 지시에 순응하고, 저희들이 목적지까지 인솔할 것입니다”라고 하더니 대오를 정리하여 앞뒤에 서서 부대를 인솔한다. 13일 학교에 들린 이 선생은 다음날 종로 2가 탑..
[17] 노병의 독백 - 국민방위군-어린박사 노병의 독백 - 어린 박사 교실에 수용된 장정은 오전엔 교실 바닥에 둥글게 모여앉아 방위군 장교가 들려주는 시사 해설이나 오락회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연병장(운동장)에 나가 제식훈련을 한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오락회 때면, 한참 유행하던 현인의 ‘신라의 달밤’을 “아. 아...,아”하고 흉내를 내고, ‘고향무정’을 멋지게 부르던 용희준(龍熙俊)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경북 문경에서 있었던 일이다. 혼잡한 국도를 피해 험악한 새재(鳥嶺) 산길을 넘어 산 밑 초가집에 도착했는데, 집안의 공간은 먼저 온 피난민이 모두 차지하고, 공간이 없어 추녀 밑에 쪼그리고 앉아 겨울밤을 새운 상호는, 새벽 동이 트자마자 걷는 것이 추위를 이기는 길이라고 생각되어,..
[18] 노병의 독백 - 국민방위군-맡겨둔 생명 노병의 독백 - 맡겨둔 생명 1951년 3월18일 아침이다. 교실에 앉아 연희대학교에 다녔다는 중대장(防衛少尉 林春在)의 민주주의를 옹호하자는 제목으로 강의를 듣고 있는데, 민주주의를 옹호해야 한다며 흑판을 향하더니, 중대장은 글씨를 쓰려다 뒤돌아서며 “옹호하자는 옹(擁) 자를 모르는데, 누구 아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드시오” 라고 하는데 누구 하나 손드는 사람이 없다. 상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손을 드니, 중대장은 상호 보고 나와서 흑판에다 옹자를 쓰라고 한다. 단상으로 올라가 흑판에다 옹(擁)자를 쓰니, 앉아있던 대원들이 환호를 하며 박수를 친다. 상호는 의기가 양양해서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밖을 내다보니, 일제 토요타 군용 트럭이 현관에 와서 멈춘다..
[19] 노병의 독백 - 국민방위군-귀향장정 노병의 독백 - 귀향장정 1951년 5월 13일 아침이다. 교육 훈련이 없다고 해서 연병장(운 동장)에 나가 서성거리는 데, 하얀 사람의 물결이 위병소 앞에서 진주 쪽으로 흘러간다. 철조망 가로 달려가서 걸어가는 사람의 물결을 바라보니, 하얀 색이 까맣게 찌들어 뿌옇게 부풀은 한복을 입은 젊 은이의 무리가 이불 보따리를 지고,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힘없이 걸어간다. 철조망을 잡고 걸어가는 젊은이에게, “무엇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으니, 자기들은 “통영 초등학교에 주둔 중인 국민방위군 병력으 로, 국민방위군이 해산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다”라고 대답 한다. 오후 1시가 되자 주번사령이 나와 병력을 집합시킨다. 사열대 위엔 현역 육군중위가 서 있는데, 신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