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노병의 독백 - 6.25 사변-同族相殘 노병의 독백 - 6.25 사변 同族相殘 북쪽엔 소련군이 지주하며 군정을 펴고, 남쪽엔 미군이 들어와서 군정을 하며, 각각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정치를 하지만, 외치는 구호는 요란한 데, 어제까지의 생활 방법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전체주의 교육을 받은 상호로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둘 다 솔깃한 주장이오, 헷갈리는 소리지만, 학교 등록금 마련을 위해 밤낮으로 뛰어야 했던 상호에겐 공산주의가 유혹을 한다. 1950년 6월 17일, 다른 사람은 포장된 ‘아스팔트’ 길을 걸으며 중학교(구제) 를 다니고, 따듯한 온돌방에서 잠을 자며 졸업장을 받았지만, 상호는 가시밭 길을 걸으며 학교에 다니고, 길가에서 잠을 자며 졸업장(선린공립상업중학교) 을 손에 쥔다. 중학..
[12] 노병의 독백 - 6.25 사변-인민군 정찰병 노병의 독백 - 인민군 정찰병 38선을 넘어 남쪽을 기습 점령한 인민군은 서울에서 2,3일을 춤춤 거리더니, 한강을 건너 파축지세로 남침하여 천안까지 침공해선, 공격 방향을 영남 지역과 호남지역으로 돌린다. 6,.25 사변이 발발하자 고향으로 내려온 상호는 마땅한 피난처가 생각나지 않아 집에서 서성거린다. 사변이 나고 한 달이 지난 7월 중순이다. 아침밥을 먹고 마루에 않았는데, 밖에서 주인을 찾으며 빨간 바탕에 노랑색 고무래 정(丁 )자 견장을 단 인민군 특무장이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온다. 호남 지역으로 남침을 계속하던 인민군의 정찰병이다. 가까이 오는 인민군을 보고 상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않는 데, 인민군은 마루에 걸터앉는다. 작업복 상의와 작..
[13] 노병의 독백 - 6.25 사변-공산당은 우익 인사를 학살한다 노병의 독백 - 공산당은 우익 인사를 학살 한다 저녁 상머리에서 상호 여동생이 말하기를, “모를 심던 인호(金仁鎬)가 등 넘어 역말의 동수(李東洙)에게 끌려갔는데, 저녁때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한다. 동수 동생 성수(李星洙)는 6.25 사변이 나기 전에 공산당을 지지하는 전단을 야간에 집집마다 뿌린 적이 있는 데, 그 뒤로 양복 입은 청년 2명이 동네로 들어와서 인호에게 성수네 집을 묻기에, “등 넘어 역말이다”라고 가리켜 주었더니, 청년들은 역말로 넘어가서 성수를 데리고 가더니, 오늘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자유당 시대엔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사변이 발발하니 인호가 성수네 집을 묻는 청년에게 “등 넘어 역말이다”라고, 가리켜..
[14] 노병의 독백 - 6.25 사변-공산당의 집단학살 노병의 독백 - 공산당의 집단 학살 1950년 9월 26일 추석날 아침이다. 면 인민위원회에서 만 17세로부터 40세까지의 젊은이는 12시까지 보리쌀 2말을 짊어지고 면 인민위원회 광장으로 모이라는 동원령이 떨어진다. 낙동강까지 진격한 인민군이 전투를 중지하고 의용군의 보충을 기다린다고 한다. 부락 사람을 야간에 돌다리 느티나무 밑에 모이게 하고, 공개적으로 뽑던 모병 방식이, 상황이 급해 부락 단위의 집회가 아닌 동네 단위의 서면 모병으로 인원이 집결되면, 부락 단위가 아닌 동네 단위로 면 인민위윈회까지 오라고 한다. 젊은이의 대부분은 피난을 가고 동원령에 응한 사람은 10여 명 뿐이다. 동원에 응한 사람은 의용군으로 끌려가 낙동강 전선에서 죽으..
[15] 노병의 독백 - 6.25 사변-서울로 가는 길 노병의 독백 - 서울로 가는 길 1950년 10월 하순이다. 상호는 공산 치하에서 4개월을 숨어 지내는 데, 9월 28일 서울에서 인민군이 물러가고 치안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상호는 서울로 옿라가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결심하고 집을 나선다. 100리 길을 걸으며 동네 입구마다 보초 서는 치안대원에게 인민군이 패퇴하고 서울이 수복됐다는 말을 듣고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 서울로 간다니까 통행을 허락한다. 서울로 가려면 걸어서 이틀이 걸리는 데, 온양온천에서 해가 저물어 여인숙에서 하루 저녁을 묵을 때다. 걸어 오느라 피로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어 곤하게 잠든 한밤중에 상호를 깨우는 인기척에 놀라 눈을 뜨니, 5,6명의 청년이 잠자는 상호를 둥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