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노병의 독백 - 월남전쟁-유격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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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노병의 독백 - 월남전쟁-유격훈련

[34] 노병의 독백 - 월남전쟁-유격훈련

노병의 독백 - 월남전쟁 유격훈련

1954년 4월 5일이다.

월남으로 떠나기 전에 1개월간 유격훈련을 받기 위해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에 있는 유격 훈련소로 입소를 한다. 

밀림 지대에서 ‘베트콩’과 싸우려면 비슷한 환경과 여건에서 산악지 훈련을 받은 후 월남전에 참전하라는 육군본부 명령이다. 

밧줄을 잡고 경사진 나무판을 오르내리고, 계곡을 가로질러 밧줄 3줄로 가설된 구름다리에 올라, 좁혀진 밧줄을 넓혀가며 계곡을 건너가는 산악지훈련, 밧줄을 사용해서 절벽을 오르내리는 ‘레펠 훈련, 산과 저수지를 가로지른 밧줄에 ’도로래‘를 달고 ’도로래‘에 의지해서 저수지를 건너는 도하훈련과, 야간에 지도에 의지해서 목적지를 찾아가는 야간 독도법 훈련으로 파월 자병은 월남으로 떠나기 전에 ’베트콩‘과 싸울 수 있는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다. 

훈련 도중 사호 집이 서울이란 것을 안 동료 장교들이 수송함 간부 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훈련 종료 하루 전에, 상호를 서울로 내 보 내기로 의견을 모은다.

아침 일찍 훈련장을 빠져나와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고 정오가 지 나 서울에 도착, 종로 2가 금은방(精金舍)에서 수송함장과 군사부장 에게 줄 군인이 ‘앞에 총’을 하고 있는 트로피 2개를 6천 원에 구입 하고 발길을 돌린다. 

대학교 동기동창인 장한(張桓)군이 논산 “쌤 폴” 여자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어, 장군에게 월남으로 떠난다고 전화를 걸었더니, “군대 생활은 오래했으니 나와 함께 교 편을 잡을 의사는 없느냐”고 묻는다. 

군인이 제대를 하려면 3개월 전에 예편(豫編) 상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오, 군인은 싸움터에서 죽는 것이 영광스럽다고 느껴져서, 상호는 “성의는 고마우나 군복을 입었으니, 전쟁터로 가겠다”라고 그의 제의를 완곡히 거절하고, 용무를 마치자마자 구로동 집으로 향한다. 오후 늦게 집에 도착하니, 상호 아내는 갑자기 나타난 상호를 보고 깜짝 놀란다. 

상호는 밤이 깊도록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지난날 있었던 회로애락을 되새기며 추억을 더듬는다. 

아침 일찍 한양대학교 건축학과에 다니는 상호 6촌 동생 명화 (明和)가 찾아와서, “전쟁터에 가더라도 무사히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서울에서 다시 만나자”고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간다. 

오후에 부산으로 떠나는 파월장병 특별 수송열차를 타기 위해 청량리 역으로 나가니, 대합실은 월남으로 떠나는 파월자병 가 족으로 발 디딜 틈도 없으며 어립 잡아 5백 명은 넘을 것 같다. 혼잡을 피해 열차가 도착하기 전에 플랫포음 전신주에 올라가 열차의 도착을 기다리는 젊은이도 있다.               

오후 7시에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서서히 다가오자, 객차 안에선 “자유통일 위해서 임들은 모였으니...,”하고 맹호부대 노래가 플랫 포음 가득히 울려 퍼진다. 

오늘의 수송열차 주인공은 맹호부대 장병 들이다. 열차가 멈추자 상호는 8살 된 큰아들과 6살 된 작은아들에 게 작별인사를 하고, 아내에겐 아이들과 집안 살림을 부탁하고, 객차 승강대로 뛰어오른다. 

상호가 마지막 순간을 보지 않으려다 뒤돌아보니, 아내 표정이 일그러져 있다. 

객차 안에선 사병이 객차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모여든 군중 속에서 자기 가족을 찾으려고 아우성이다. 상호는 처남인 승임(承任)이의 모습이 안 보여 섭섭했는데, 공군 이강재 소령이 상호를 보더니, “자네 처남이 자네를 찾고 있다”라는 말을 듣고, 처남의 성의가 불가항력으로 막혔다고 생각되어 섭섭한 감정이 미안한 마음으로 변한다. 

창가(窓邊)에 앉은 사병이 먼저 가족을 찾았다. 50이 넘어 보이는 중년 여인이 어머니를 부르는 사병을 보고 울며 창가에 매달린다. 

군인을 찾은 가족은 창가에 매달려 눈물만 흘리고, 군인을 찾지 못한 가족은 객차 안에 있을 군인의 이름을 부르며 플랫포음을 오르내린 다. 

상호 옆에 앉은 사병은 가족이 나올 수 없는 지방 출신인 듯, 다른 장병의 애끓는 이별 장면을 외면한 채 눈을 감는다. 

열차가 서서히 움직이자 상호가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밖의 동정을 살펴보니, 군인가족이 떼 지어 열차를 따라오고, 상호 아내는 일그러진 얼굴로 팔을 휘저으며 움직이는 열차를 따라오고, 큰아들과 작은아들은 영 문도 모르고, 엄마 손에 매달려 열차와 나란히 뛰고 있다. 

상호가 아내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손짓을 하자, 양손으로 아이들 손을 잡고 뛰고 있던 아내 표정이 굳어진다. 

젊은 여인이 창 밖에 머리를 내밀고 이별을 아쉬워하는 사병을 보며 움직이는 열차 를 따라 나란히 뛰다가, 열차의 속도가 빨라지자 더는 따라오지 못 하고 그 자리에 넘어진다. 

떠나는 군인이나 남아있을 가족이나 눈물 없이는 보지 못할 장면이다. 

헌병이 플랫포음 중간에 서서 달려오는 가족이 더는 따라오지 못 하도록 양손을 벌려서 막고 있다. 이 때가 1969년 5월 16일 오후 8시 30분이다.

청량리 역을 떠난 열차는 새벽 3시에 대전 역에 도착한다. 

플랫포음은 전기불로 대낮같이 밝으며 인적은 드문 데, 검은 양복을 입은 40대 전반의 신사 2분이, 가랑비 속에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이름 석자가 쓰인 우산을 받쳐 들고 빙글빙글 돌리며 기관차 쪽으로 걸어간다. 

새벽의 대전 역은 인적이 드문 데, 전신주 그림자만이 길게 플랫 포음 공간을 메우고 있다. 

날이 밝으며 열차는 부산 부두에 도착 한다. 오후 2시에 제3부두에서 파월장병의 환송식이 있다고 한다. 

오후가 되자 부두에 임시로 가설된 무대에서, 부산 방송국 여자 전속 가수들이 대중가요를 소리 높이 부르며 엉덩이를 흔든다. 

무대 주변 엔 파월장병을 환송 차 나온 군인 가족들이 100여 명, 남자 고교생 이 100여 명, 여자 고교생이 100여 명으로, 300여 명이 파월장병 환송식을 보려는 관람객 100여 명과 같이 뒤엉켜 웅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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