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노병의 독백. 인사말과 목차. 나는 영웅들과 함께 있었기에 살아남았다. 연재물을 종합하며 평생 살아온 발자취를 돌아보며 작년 8월부터 글을 썼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후련하다. 솔직히 말한다면 "회고와 수상을 집필한다"라고 쓰고 싶은 데, 감이 내가 회고와 수상이라고 할 만한 위인도 못되고, 그렇다보니 발자취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다. 정말 바쁜 세상을 살았다. 남들은 권력이 있고 배경이 있어서 나름대로의 취미 생활과 즐거움으로 한 세상을 살았는데, 나는 권력도 없고 배경도 없으면서 주변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려니, 항상 바쁜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내가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니, 내가 나를 생각해도 대견하다. 나이가 들어도 취미다운 취미가 없어서 “컴맹..
[1] 노병의 독백 - 과거의 상관들. 채명신 사령관. 조주태 사단장 3년여에 걸친 6.25사변은 동족상잔의 참화를 남긴 채 휴전에 이른 지 반 세기요, 월남에서 포성이 멎은 지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나, 오늘도 세계 곳곳에선 포성이 멈추지 않고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1965년부터 1974년까지 우리 젊은이 32만 명 가까운 장병이 월남전에 참전하여 5천명 가까운 장병이 고귀한 생명을 바치고, 1만 5천여 명이 신체의 일부를 손상당했으며, 그중 일부는 손발이 잘린 채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니 월남전과 당시의 사회정세를 모르는 젊은 세대들은 파병의 의의와 전쟁의 참혹상을 모르는 이 때, 다시 이라크로의 파병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을 맡았던 나로선 베트남전..
[2] 노병의 독백 - 요산요수회(樂山樂水會) 사람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사업을 벌이고 열심히 뛰던 사람도, 나이를 먹으니 싫던 좋던 간에 벌였던 사업을 자식들에게 인계하고 주변을 정리해야 할 시기가 돌아온다. 가을의 오후 따듯한 날씨에 건강을 염려해서 근린공원 보행도로를 돌며 운동을 하던 노인들도 운동이 끝나면 휴게소로 가서 휴식을 즐기고, 휴게소에 사람이 있는 것을 확인한 요산요수회 사람들이 공원에서 놀다가 하나, 둘씩 휴게소로 모여든다, 대한청년단의 훈련부장을 지냈다는 김수종(金壽鍾), '케이로'부대원이었다는 민항기(閔恒基)가 마루에 앉아서 오른쪽 다리를 절며 다가오는 상이군인 박성기(朴聲基)를 맞는다, 지금은 별 볼 일 없이 공원에서 소일하는 노인들이지만, 젊어서는 나..
[3] 노병의 독백 - 식민지정책과 우민(愚民)정책 일본인 실업자의 한반도 진출 사람은 출생으로부터 사망 시까지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지만, 일본 식민지 하에선 뚜렷한 목표나 희망도 없이,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날그날을 살아남기 위해 움직여야 하던 우리 민족에겐, 위(里長)에서 떨어지는 명령과 지시가 절대적이며, 항의나 변명이 필요 없이 처해진 환경과 닥쳐오는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식민지 국민의 운명이오, 순리다. 상호 호적엔 1930년 12월 24일 강원도 춘천읍 약사리 25번지에서 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출생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상호가 기억하는 것은 5살 때 춘천초등학교 밑에 일본말로 아사히마찌(旭町)에 위치한 초가집이다. 1930년대 사회상은 일본의 식민지 ..
[4] 노병의 독백 - 울보에서 싸움쟁이로 일본의 침략 야욕이 팽창하여 1910년 인접국인 한국을 합방하더니, 1931년 3월엔 중국의 동북지역을 떼어서 만주라는 일본의 괴뢰정부를 수립하고, 그 여세로 5월 중국 광동에 왕조명(汪兆銘)에 의한 친일 국민정부를 세운다. 7월엔 만주에 진출한 한국인 농민을 선동해서 만주 농민과 충돌시켜 교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일본군이 출동하여, “만주사변”이 발발한다. 1937년 7월 7일엔 북경에 있는 노구교(蘆構橋)에서 중-일군대가 무력충돌을 하더니 만주사변이“지나사변”으로 발전한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며 일본은 국가 총동원령을 선포한다. 사회는 전시체제로 바뀌며 국민들은 궁핍생활을 강요당한다. 일본 ..
[5] 노병의 독백 - 온돌과 무연탄 그날은 상호가 온돌의 난방을 책임지는 온돌당번 날이다. 기숙사 무연탄 저장고엔 무연탄이 없지만 방을 따뜻이 하는데 무연탄이 없다는 것은 이유가 안 된다. 평일엔 기숙사에서 공장으로 나가면, 상호는 붕사의 함량을 분석하는 분석실에서 화학방정식(化學方程式)을 풀고, ‘프라스코’에 들어있는 붕사를 녹인 액체에 시약(試藥)인 ‘만닛토’를 2,3방울 떨어트려 붉은 색으로 변한 액체를 흔들며 일하는 체 하나, 그날은 온돌의 난방을 책임지게 되었으니, 마음속으로는 하루 종일 온돌방을 어떻게 하면 따뜻이 하나 궁리만 하는 데, 무연탄이 산더미 같이 쌓인 공장 저탄장(貯炭場) 생각이 난다. 상호는 일과 시간에 저탄장에 가서 무연탄 한 덩어리를 주어서 무연탄을 철조망 밑으로 갖다 놓고..
[6] 노병의 독백 - 색깔 다른 배급통장 일본은 130여 년 전(1867) 명치천황이 즉위하여 유신을 선포하며 천황의 권력이 강화되자 군사력이 팽창하며 국력이 신장되고, 아들인 대정천황을 거쳐 손자인 소화천황대에 이르러선 침략 정책이 노골화 된다. 1910년에 일본은 이웃나라인 조선을 합방(合邦)하고, 중국을 침략(1931)하며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 하여 동아의 여러 나라는 같은 운명이라고 해서 동남아 각국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일본의 남진 정책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영국에 의해서 경제활동을 봉쇄당하고 남태평양의 해로길이 막히자, 동남아 제국(諸國)에서 자원을 확보하고 해로를 장악하기 위해서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하며 미국과 영국에 대해 선전을 포고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발..
[7] 노병의 독백 -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이념의 대립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패배(1945.8.15)하고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니, 한민족(韓民族)은 36년간의 일본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된다. 일본 사람이 본국으로 철수하니 국민들은 피식민지(被植民地) 국민의 공포에서 해방되고, 젊은이는 징병과 징용이란 이름으로 군대와 공장에 끌려갈 공포가 사라진다. 처녀도 여자정신대란 이름으로 종군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아 좋았다. 저녁이면 부락마다 울리는 풍물 소리가 여름내 들려온다. 여자 공출(군대위안부)을 피해 한 달 전에 아랫집 순이(李順伊)는 16의 나이로 이웃 마을 승호(金勝浩)에게 시집을 갔는데, 시집가고 난 뒤엔 임자 있는 몸이라 여자 공출을 면했는데, 해방이 되니 한 달을 못 참은 순이가 결혼을 비관한..
[8] 노병의 독백 - 장돌뱅이 인천 히타치 공장에서 해방을 맞은 상호는 고향인 충남 예산으로 돌아온다. 약간의 도조(賭租-토지를 빌려주고 그 대가로 수확량의 50%를 받는 토지 임대제도)를 받아 생계를 이어가던 상호네는 군정 청에서 공포한 토지개혁령으로 지주와 소작인이라는 토지 임대제도가 없어지고, 토지가 지가증권(地價證券) 한 장으로 정부에 수용되고, 소작인은 신고만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토지를 분배받아 자작농 민이 된다. 생활의 터전을 잃은 상호는 먹고 살아야 하겠는 데, 땅이 없어 농사는 못 짓고, 살기 위해선 장사를 해야 하겠는 데, 상호 수중엔 장사할 밑천이 없다. 지금 생각하니 사회의 대 변혁기이며 지주가 몰락하던 시기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은 먹는다고 하는데 상호네는 소지주로서 당장 생활의 ..
[9] 노병의 독백 - 첫사랑 나무를 지고 동네가 보이는 등성이를 넘자니 숨이 차며 나뭇짐이 어깨를 누른다. 눈앞에 산등성이가 다가오니 마음만이 앞으로 나갈 뿐 발은 제자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먼저 올라간 관호(金寬鎬)가 산등성이 묘지 앞 양지바른 곳에 “쾅”하고 지게를 받쳐놓고 “후유우”하고 긴 한숨을 내쉬며 무명 적삼을 훨훨 벗는 다. 고갯길이 험하다 해도 보릿고개보다는 넘기가 수월하다. 여름에 논에 나가 김을 매며 해가 길고 지루해서, 허리를 펴며 서산에 지는 해를 눈으로 끌어 내리던 여름 해보다는 겨울 해는 너무도 짧다. 아침 상머리에서 콩 섞인 보리밥 한 사발을 게눈감추듯 먹어치우고, 이웃집 관호하고 30리 떨어진 가야산까지 먼산나무를 가서, 마른 솔가지를 주워 지게에 지고 일어섰을 때는 해가 ..